에피로그2-2

에피로그2-2

석두 5 5,745
그로부터 한 달,
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아직 이승이 낫다는건지 죽기에는 자염의 자살이 내 탓이 아니냐는 강력한 항의가 내 맘속에서 일어납니다. 비열하고 비겁하고 그리고 약삭빠른 처신인지, 난 죽을 용기가 없었는지 아님 굶어 죽기 싫었는지 죽자던 결심은 어데가고 헌병대에 자수합니다.
아주 얄팍한 계산이 거기에 깔려있습니다.
군탈, 군형법 30조, 군무이탈 죄, 즉 탈영병은 형량이 높지 않습니다. 두어달 근무지 이탈에 자수이면 징역 2개월이 좀 높고, 대부분 1월에 집유도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두서너달 감방에 처박혀 고생하면 죽은 소녀에게 약간이라도 죄 갚음 될거라는 계산 말입니다.
6월달에 군법회의는 내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군법 30조 위반 최고의 형량이 떨어진 이유는 그 시기에 탈영범 일제단속기간이였습니다. 선처라고는 없는 무조건 최고의 형을 때리는 기간이였습니다. 억울할 것도 없지요. 당해도 싸지요.
그래서 지옥 같은 군형무소 부산12교도소로 갑니다. 12교도소는 지금 서면의 최고 변화가 부전동 경남공고와 나란히 있었습니다. 현재 흥국생명 빌딩 앞길은  그 당시 12교도소 영내 한 가운데로 가로질러 흐르는 도랑을 복개한 길이라 지금은 서면 바닥의 노란자위 땅입니다. 12교도소는 도랑을 사이로 황령산 쪽은 헌병대 영내가 되고 도랑의 반대쪽은 기억자형 철조망에 둘러싸여 1동, 2동, 3동의 막사로 구성되어 600여명의 군인죄수들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황령산쪽 부대 뒤로 지금은 전포로가 휑하니 개설되어있고 애플체험센타가 그 길 가에 있습니다. 어쩌면 12헌병대 차고지자리가 그 자리일른지 모르지오.
1968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특사로 2달 앞당겨 출소하니 그 사이 9보충대는 명장동으로 이전하여 월남참전용사 귀국절차를 밟는동안의 숙사로 2층시멘트 막사가 언덕위에 우뚝이 서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대기하였다가 특명을 받고 떠났습니다.
이제 별 한개 단, 아직 군복무 6개월도 못한 내가 간 곳은 대구 보충대. 2군사령부 직할보충대. 거기서 받은 특명은 812공정대란 데다. 부대 위치는 광주로 알았는데 가서 보니 상무대 영내였습니다.
상무대. 그 당시 광주역과 송정리역 중간쯤 위치했는데 지금은 부대 이전하고 그 자리는 상무아파트단지라던가?
보병학교, 기갑학교, 또 뭐더라? 포병학교, 육군장교 초급 전술교육대이다. 소위 게급장 달고와서 뺑뺑이 열나게 돌고는 장교의 위엄을 갗추고 전방으로 가서 복무하는 첫 단계이다.
내 친구는 이 곳 상무대 포병교육 받든 중 첫 외출에서 처음 본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훈련기간의 주단위로 계산해서 커피 6잔 시켜놓고 넉넉하게 마셨다더라. 참 이 친구도 대학 재학중 칸타빌레 음악실 단골이였다.
  내가 간 부대는 부대 안의 부대안의 부대라고 옆의 부대하고는 철조망 하나가 경계지역이였다. 공정대가 뭔가는 나중에 안 말이고, 난 그날 전입신고를 정확히 16시간 늦게해서 내가 행정반에 들어서서 신고식 치루는동안 사병계가 탈영보고서를 찢더라. 나와 같이 이 부대로 특명 받은 놈이 자고 일어나니 없는데 나도 미귀한거다.
 왜 늦었냐고? 2군사령부 보충대에서 해방되자마자 특명 받은 부대로 바로 가야 되는데 교도소 출신 우리는 무슨 특전사인양 특급열차에 무임승차하여 부산으로 내 뺏다가 다음날 오후 4시반 12열차 타고 가서 대전발 0시 50분의 호남선 갈아타고, 송정리역에서 내려야 되는데 뭘 몰라 광주역까지 가서, TMO까지 가서 물어물어 오다보니 늦었다.해서 안내 받아 상무대 정문을 당당히 통과하여 미로 같은 길을 헤매어 찾아갔으니, 사병계가 미칠거 아니겠소'
탈영보고 찢은 사병게가 나를 부릅니다.
전이병! 여기 좀 오소.
그래서 신상명세서 씁니다. 보고있던 사병계 입이 딱 벌어집니다. 세상에 이 말썽쟁이들로 차출되어 급조된 부대에 왠 전국 상위권에 든다는 B고 출신 전과자? 당장 자기 조수감입니다.
나도 그런줄 알았습니다만, 아주 인상 험악한 중위가 행정반에 오드니 이놈은 주특기가 병기보급병이니 당연히 우리가 써야겠오.
참! 2군사령부 보충대에서 특명 받기 전 날 또 자염이 꿈을 꾸었습니다. 처음보다는 애무의 농도가 얇긴했지만 한마디 합디다
"미스타 전, 잘 살아" 

Comments

★쑤바™★
놓지못해 끌어안았는데..
이제 스스로 놓아버리네요...
무의식중에 놓아달라 애원하는 마음 전달하지 않으셨나요? 
찰리신^.^~
저는 몸으로 포를 짊어지는 전포..몸무게도 60도 안나갔는데 70이 넘는 포열을^.^~ 
명랑!
저도 포병에서 유선병이었는데
행정반에서 행정병(교육계) 하라고 종용하는걸 뿌리치고....
내가 똘똘 해 보였나? 아닌데...ㅋ~~ 
화이트
전포동  제가 25년을 살았던 고향인데....
님 때문에 전포동이 그립습니다. 
mamelda
이제 떠나가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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